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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주는 아크 - 아란 / 종강 뒷풀이

 

어느 한여름 밤, 그녀가 겪은 이야기

"시험 시간 다 됐습니다. 다들 답안지와 시험지 제출하시고 퇴장하셔도 됩니다. 한 학기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험이 끝났음을 조교가 낭랑한 목소리로 알리자, 모든 학생들이 답안을 쓰는 내내 들려온 강의실을 가득 채운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드디어 멎었다. 줄을 서서 시험지와 답안지를 제출하는 이들의 표정에는, 홀가분함과 걱정스러움, 즐거움과 아쉬움이 모두 섞여 있었다. 물론 그건 아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일단 시험이 끝나긴 했으니 다소 홀가분한 기분이 드는 건 나쁘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란을 포함한 몇몇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짐을 들고 학교 건물 앞 커다란 나무 그늘로 모였다. 시원한 바람과 그늘, 나무 특유의 향기는 그들의 감정을 한결 차분히 덮어주는 듯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온 이후 계속 이어진 침묵을 먼저 깬 건 메르세데스였다.

"뭐야, 다들 시험이 끝났는데 조금쯤은 표정 펴지 그래? 어차피 여기서 지금 가만히 있어봤자 우리 성적이 더 좋게 나올 가능성 따윈 제로라고."

 청초한 외모와 달리 다소 과격해 보이는 느낌의 발언은 그녀를 잘 모르는 이들에겐 위화감이 들게 하는 행동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행동이었다. 그런 그녀의 말투에 팬텀이 능글거리며 맞받아친 것만 봐도 그랬다.

"그래, 메르세데스. 네 말도 맞아. 그런데 그건 너처럼 학점을 포기한, 아니,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사람들 정도는 돼야 가능하다고. 시험 끝난 지 겨우 몇 분 지났다고 시험 성적에 대한 걱정을 다 털어버릴 수 있겠어?"

 그는 메르세데스라는 여학생의 말에 능글거리려다 그녀의 표정에서 심상찮은 무언가를 읽은 듯, 재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가볍고 장난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도를 넘거나 분위기를 깰 정도로 지나친 장난은 치지 않는 통찰력이 그에게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란은 그런 그의 모습이 가끔은 얄밉기도 했지만, 그의 재치와 순발력 등은 높이 사고 또 좋게 보는 편이었기에 그것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유일한 새내기이던 에반이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약간 울상을 짓고 공감하듯이 말했다.

"팬텀 선배 말이 맞아요. 저는 게다가 이번 학기가 첫 학기라서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도 궁금하지만 걱정되기도 한다구요. 교수님들이 어떻게 성적을 매기실지도 잘 모르겠고…."

"어라, 이전에 전해들은 바로는 에반 너희 부모님께서는 그다지 성적에 신경 쓰시지 않는다면서? 굳이 1학년 때부터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는 거니?"

 

 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확실히 이전에 싱싱한 과일들이 학과 사무실로 보내졌을 때, 그의 부모님이 같이 보낸 편지에서는 성적은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아들이 그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에반의 부모님이 에반에게 시시콜콜하게 간섭하고 일일이 다 챙겨주려 하는 극성 부모는 아니었다. 그 편지에도 지극히 평범하고 다정한 부모님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 있었고, 집안 사정이 영 좋지 않은 몇몇 선배들은 그런 에반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에반이 지금 이렇게 성적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이유를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모님이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제 갈 길은 제가 닦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잖아요. 또 1학년 때 놀다가 학점 구멍 나서 나중에 고학년 때 재수강하거나 하면 그 때는 그 때대로 신경 써야 할 게 있는 데 더 정신 없을 거 같고, 지금 이대로 꾸준히 하는 게 좋은 거 같아요."

"하긴, 그러고 보니 은월 녀석은 좋아하는 교수님이 연구년으로 수업을 안 하신다 하니까 충격 먹고 우울증 온 덕분에 무단결석 엄청 해서 학사경고까지 받을 지경에 이르렀다가 한 학기 동안 병원에서 상담한 내역서하고 진료기록까지 떼와서 간신히 면했다지? 저거보다야 에반 네가 낫긴 하다, 푸하핫."

 고동색 머리의 묘하게 우울하고 차분해 보이는 남학생에게 아란이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자, 그는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작게 항의했다.

"그건 내가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좀 안 보였다 해서 사람의 존재 자체를 까먹은 너희들도 잘한 건 아니지 않아? 진단서 제출하러 학교 왔는데 같은 과 친구들이었다는 놈들이 얼굴도 기억 못하고 말야."

"아아, 미안. 근데 난 좀 빼주라. 학기 중에 교통사고가 났다가 일시적 기억 상실이 와서 너 말고 다른 애들도 기억 못했거든! 그나마 내 남동생이 내게 있었던 일들을 꽤 정확히 알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란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녀에게는 쌍둥이 남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이란성 쌍둥이임에도 외모가 상당히 닮아 같은 학교를 다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항상 학교의 유명인사일 정도였다. 다행히 대학교는 다른 학교로 갈라져 지금은 그다지 이목을 끌 이유가 없었고, 거추장스럽거나 주목을 받는 상황이 싫은 아란은 이런 지금의 환경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학교가 달라지긴 했지만 기억 상실을 겪고 나서 남동생 덕분에 기억을 거의 되찾았고, 덕분에 사이는 사고가 나기 전보다 더 좋아졌다.


 기에, 나이는 가장 어리지만 아란과 가장 오래 알고 지내던 에반은 자기 형인 유타도 좀 철이 들면 좋겠다고 하며 아란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확실히 아직도 다소 까불거리는 성격의 유타 밑에서 동생으로 자란 에반은 겉으로는 말수도 적고 키와 덩치도 커서 무뚝뚝하고 무서워 보이지만, 속정이 깊고 사람을 잘 챙겨주며 믿음직한 아란의 남동생을 부러워하는 건 그런 까닭이 있었던 것이었다.

 

"아란 선배는 남동생 분이랑 사이가 좋아서 부러워요. 저도 제 형이 철 좀 들면 좋을 텐데!"

"뭐, 유타도 언젠간 철이 들지 않겠어? 카밀라와 있을 때면 딴판이라고 네가 그랬던 거 같은데, 계속 둘이 같이 지내다 보면 유타도 진짜 어른이 될지도 모르지."

 

 아란이 웃으며 에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은발에 오드아이인 한 남학생의 목소리가 아란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나저나 잡담이 너무 길었던 거 같은데, 분명 6시부터 종강 뒤풀이 파티라고 하지 않았나? 예약까지 해놨는데 늦는 건 실례라고 생각해."

"아, 루미너스 아니면 깜박할 뻔했네. 얘들아, 슬슬 가자. 시간이 얼마 안 남았었구나. 고마워, 루미너스!"

 자신이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제외한 모두는 일정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거라 생각하니, 루미너스는 아란의 대답을 듣고 묘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이런 그의 모습은, 귀찮거나 피곤해하면서도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타입이 아니라면 볼 수 없었을 것이었으리라고, 아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도착한 호프는 아직은 여름이라 미처 밤이 찾아오지 않았던 탓인지 상대적으로 평소보다 덜 소란스러운 편이었다. 예약한 테이블에 각자 자리를 잡자, 팬텀이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자자, 주목!" 

"팬텀?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메르세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팬텀은 묘하게 인심 썼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별 건 아니야. 그냥 시험도 끝났고, 한동안 얼굴도 못 볼 거 같으니까 1차는 내가 쏠까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려고 했지."

"와아! 선배, 그거 진짜예요? 그럼 저 감자튀김 많이 시켜도 돼요?"

 에반이 기뻐하며 물었다. 아란은 그런 에반의 모습을 보고 귀엽다는 생각과 신기하다는 생각을 동시에 떠올렸다. 어릴 적부터 감자 요리를 질리도록 먹어와서 싫어하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이 녀석은 감자를 보는 족족 작살을 내니. 아란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팬텀은 새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그래, 먹고 모자라면 더 시켜. 이 선배 돈 많으니까."

"이야, 역시 금수저 팬텀님인걸? 그럼 생맥에는 소시지니까 소시지도 시킨다?"

"너는 외모만 보면 이슬만 먹고 살 거 같은데 이렇게 고기안주만 먹어도 살 안 찌는 거 보면 신기하다, 진짜."

 아란이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 시늉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르세데스는 그녀의 그런 시선에 다소 우쭐한 모양이었다.

 

"나는 평소에 운동을 하니까! 이 꿀벅지도 그 운동의 성과 아니겠어? 비교적 걱정 없이 좋아하는 음식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데."

"하긴, 네 성격에 하고 싶은 걸 제대로 못한다는 건 정말 지옥일 테니까. 그리고 고기는 진리이기도 하고!"

 아란이 웃으며 동조했다. 은월이 그녀를 힐끗 보고 맥주가 가득 찬 잔을 살짝 흔들자, 아란은 그걸 알아듣고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자, 그럼 종강도 했고 맛있는 것들도 있으니 빨리 해치워 보실까! 자, 다들 짠 한 번 하자!"

"좋아요!"

 망설임 없이 에반이 잔을 내밀자 다른 이들도 앞다투어 잔을 맞부딪쳤다. 쨍! 청량한 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렇게 잔이 몇 번 오가고 안주가 반쯤 남게 되자, 슬슬 술에 취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아란의 눈에 띈 것은 에반을 교육하는 은월의 모습이었다.

 

"에반, 너는 술 취했을 때는 메르세데스를 본받아서 정신을 꼭 차리고 있으렴. 그렇지 않으면 열심히 쌓아왔던 이미지가 한방에 깨질 수 있단다. 물론 메르세데스는 술 때문에 이미지를 깬 건 아니지만."

"어머, 은월. 내 이야기 하는 거니?"

 월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골뱅이무침을 질겅질겅 씹으며 가리킨 자리에는 맥주와 소주를 참 골고루 들이켰음에도 여전히 멀쩡한 모습을 자랑하며 방긋 웃어 보이는 메르세데스가 있었다. 사실 그녀의 다혈질 본성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여기 술자리에 있는 이들이 그럼에도 그 사실을 아는 까닭은 중간고사 직후 2학년들끼리만 했던 뒤풀이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아란이 자세히 그 이야기를 보충했다.

"이야, 그야말로 엄청났어. 메르세데스와 테이블 끝쪽에 앉았는데, 맞닿은 다른 쪽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추근대면서 허벅지에 손을 슬쩍 올리자마자 냅다 창 던지는 것처럼 메다꽂았거든. 난 도와주려고 슬쩍 녹화하면서 증거 잡을 생각이었는데 깜짝 놀랐어. 메르세데스는 아마 다들 술에 취해서 기억 못했을 거라 생각했나 본데 나도 만만찮은 말술이라, 그 때 그 영상 아직도 내 폰에 저장되어 있다?"

 아란이 키득거리며 폰을 꺼내려 하자, 메르세데스가 황급히 제지했다.

"그만해. 네가 어디 퍼트릴 거란 생각은 안 하지만, 그래도 소문은 무섭다구. 그리고 만약 어딘가에 그 이야기 관련된 소리가 조금이라도 나온다면 그 다음에는 너를 땅에 메다꽂아 주겠어."

"네네, 여왕님. 술이나 한 잔 더 하시죠. 여기 맥주 2000cc 더 주세요!"

"적당히 마셔. 그렇게 마시다간 내일 아침 숙취로 고생한다. 뭐든 적당히가 좋은 건데 왜 사람들은 그걸 모르는 거지."

"나는 술 잘 마시는 편이라 이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내가 언제 숙취로 고생하는 모습 너에게 보인 적 있었던가, 루미너스?"

"맞아. 아란이 술 취한 모습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샌님 너도 그러니까 다른 애들한테 핀잔 주는 건 그만하지 그래?"

"흥. 내가 참견이 지나쳤을지도 모르겠군. 그걸 이 도둑놈에게 듣는 건 영 유쾌하지 않지만."

"야, 그 때는 마침 지갑 두고 나왔는데 하필 네가 화장실에 간 사이 탁자에 놔둔 지갑이 보였던 거 뿐이라고. 지갑 돌려주는 타이밍이 좀 늦긴 했지만 그래도 훔친 건 아니었잖아?"

"내 입장에선 거기서 거기야. 화장실 다녀왔다 돌아왔는데 멀쩡히 있던 지갑이 없어지면 도둑맞은 거라 생각하는 게 맞는데 뭘 변명하는 거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거칠어질 기미가 보이자, 은월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쯤에서 그만두자고. 그나저나 다들 술도 좀 돈 거 같은데, 이쯤이면 술게임 시작하기 적당한 타이밍 아니겠어?"

"말 잘 꺼냈네, 은월! 자, 그럼 너무 시끄럽게 하면 안 되니 가.볍.게. 시작할까?"

게임은 굳이 목소리 높일 필요 없는 배스킨 라빈스 31 게임으로 시작되었다. 막내인 에반부터 시작해서 메르세데스, 아란, 팬텀, 루미너스, 은월 순으로 순번이 돌아갔는데, 팬텀이 작정하고 다른 이들에게 제스처로 루미너스에게 술을 진탕 먹여보자는 신호를 보냈다. 
 아란은 이런 짜고치는 게임이 영 유쾌하지만은 않았지만, 루미너스가 술에 취하면 어떤 모습이 될지는 사실 궁금했기에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런 그들의 짜고치는 게임에, 루미너스는 영문도 모르고 술을 진탕 마시게 되었다. 아란은 루미너스의 점점 처지는 고개를 보고 내심 걱정이 되었다.

"야, 루미너스 또 걸렸어! 팬텀, 너 이건 좀 심한 거 아냐?"

"뭐 어때, 다 재밌게 놀자고 하는 짓인데!"

"아무리 그래도 소맥 4:6 비율로 연거푸 세 번을 먹였는데 이렇게 빨리 마시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구!"

"그, 그러고 보니, 메르세데스 선배."

"응, 왜 그러니, 에반?"

"루미너스 선배 술 취한 모습… 이 중에서 본 사람 아무도 없지 않나요?"

"아."

"술버릇 어떤지도 모르죠?"

"아, 아."

"지금 저거 봐요, 고개 푹 수그린 채로 뭔가 중얼거리고 있잖아요."

"너무 늦은 거 같지, 아무래도?"

"네."

 에반의 말대로, 루미너스는 술을 계속 들이킨 이후로 정체불명의 주문 비슷한 것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모두의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루미너스는 고개를 들었다.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루미너스의 붉은 한쪽 눈에서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루미너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 저기. 루미너스. 괜찮니? 너무 우리가 빨리 먹였지? 미안해!"

"음, 뭐지. 이 기분은…? 힘이… 어둠이… 넘쳐 흐른다! 끼앗핫핫핫핫!"

 

 두가 너무나도 다른, 처음 보는 루미너스의 모습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하자, 상황을 침착하게 판단하고 아란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술에 취한 탓인지 루미너스가 저항하는 힘은 상당히 강했다. 아란은 깜짝 놀랐다. 매일 공부만 하던 이미지의 과탑 루미너스에게 이런 강한 근력이 있었다니. 2학년인데도 이 시점에서 조기졸업과 대학원 진학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머리도 명철한 녀석이 힘도 이렇게 좋으니, 다소 생뚱맞게도 재능의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읍, 으브브읍으븝!"

"에반! 다른 애들 중 아무에게라도 시원한 물 한 잔만 가져와 달라고 말해줘. 그리고 은월 너는 나랑 얘 좀 붙잡고 있자. 나 혼자서는 감당이 안 돼!"

"네, 네! 팬텀 선배! 저랑 찬물 좀 가지러 가요!"

"샌님이 이렇게 일을 칠 줄은 생각도 못했는걸그래! 좋아, 가자."

"메르세데스, 너는 그, 뭐냐. 술 깨는 데 특효인 지압법 안다며? 얘 손 좀 주물러 줄래?"

"알았어, 은월. 그럼 너는 루미너스 등 좀 두드려 주고, 아란! 입 제대로 막고 있지?"

"제대로 막고는 있는데, 윽, 기분 나빠…."

"왜? 루미너스가 손을 자꾸 깨물려고 하기라도 해?"
 
 은월이 다소 정신이 없다는 표정으로 영문을 물었다. 이에 아란은 상당히 찝찝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답했다. 

"비슷한데, 자꾸 입을 막은 내 손바닥을 핥으려 해… 안돼 루미너스! 손 더러워! 핥지 마!"

"왠지 가장 애어른이었던 루미너스가 오늘만큼은 우리 중 가장 애가 되어버린 거 같은 느낌인 걸."

"이게 다 팬텀 녀석 때문이야. 오기만 해봐, 한 마디 따지고 들어야지!"

 팬텀과 에반이 얼음물이 가득 담긴 물병을 가져오자, 루미너스는 목이 말랐던 탓인지 정신이 없는 와중임에도 물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정신이 좀 든 것일까. 표정이 평소의 루미너스와 비슷해지는 것을 눈치챈 에반이 말을 걸었다.

"루미너스 선배! 정신이 들어요? 미안해요. 술 적당히 드셨어야 하는 건데."

"으, 뭔가 속이… 웁."

"야! 루미너스 얘 토하려는 거 같은데?! 빨리, 빨리 화장실로 데려가!"

"아, 아란, 머리채 너무 세게 잡은 거 같은ㄷ"

 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아란이 경악한 표정으로 루미너스를 거의 집어들다시피 하고 냅다 화장실로 던지고, 에반이 재빨리 변기에 그의 고개를 숙이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날은 루미너스 인생 최고의 흑역사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 일어난 일도 평생 겪은 부끄러운 일들 TOP 5 안에 들 정도이긴 했지만 말이지, 하고 아란은 생각했다. 그녀의 옆에는 화장실에서 겨우 나와 아직 창백한 얼굴의 에반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에반아."

 다행히 혼이 아주 나가지는 않은 모양인지, 에반은 대답했다.

"네, 아란 선배."

"그나마 다행이다. 남자화장실이 비어 있어서."

"그러게요. 게다가 타이밍도 거의 골든타임 급이었어요."

"맞아. 게다가 내가 남자화장실엔 들어갈 수는 없잖아."

"근데 루미너스 선배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야. 의외로 체력 좋은 거 같더라, 저 녀석."

"그러길 빌어야겠죠."

 일단 루미너스가 나온 뒤 그의 상태를 보고 이 이후의 일정을 정하기로 한 그들은, 한동안 남은 안주와 술을 마시며 루미너스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루미너스 대신 그들이 마주한 것은 라이벌 학과인 군단장 학과 학생들이었다. 아란은 상당한 피로감과 짜증을 느꼈다.

"어머, 이게 누구더라? 떨거지 영웅즈 학과 학생들 아니셨던가?"

"너희는 왜 또 여기까지 와서 우리랑 마주치냐? 참 악연도 이런 악연이 따로 없다."

 붉은 머리에 화장이 짙은 여학생이 비꼬는 어조로 말을 걸자, 메르세데스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신경 끄시지. 우리는 아카이럼 교수님이 특별히 사비를 털어 2차를 쏘신다고 하셔서 여기로 온 거거든? 너희는 이렇게 씀씀이 크신 교수님 없으시지? 아, 한 분인가 계셨던 걸로 아는데, 학교에 요즘 통 안 보이시더라? 너희들 싫어하는 거 아닌지 몰라."

"프리드 교수님은 그런 이유로 학교에 안 보이시는 게 아냐! 연구년이시라 올해 강의를 하지 않으시는 것뿐이라고."

"맞아. 말은 똑바로 하자, 힐라. 이전에도 너 뭐 뒤로 간계 꾸미다가 나한테 걸려서 된통 역관광 당하지 않았던가?"

 

 은월과 팬텀이 연이어 밀어붙이자, 힐라라는 여학생은 당황하고 분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그 직후, 연분홍의 숏컷을 한 다소 키가 작은 듯한 여학생이 뒤이어 반격했다.

"어머, 그 쪽의 두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은데요. 똑같이 학교에서 존재감 없으셨던 분과 같은 과 친구에게 잘못 저질러서 도둑놈이라는 별명을 얻으셨던 분. 저 정도 되니까 이런 걸 알고 있는 거지 특히, 이름이 은월이라고 하셨던가? 과 친구분들은 당신이 안 보였던 걸 눈치챘을지도 의문이네요."

"큭…!"

'소란은 피우지 말아요. 지금은 보는 눈도 많으니까요.'

 아픈 곳을 찔린 은월과 팬텀이 각각 금방이라도 정말로 화낼 거 같은 표정을 짓자, 그 둘을 제지하면서 귓속말로 진정시키려 애쓰는 에반의 모습에 아란은 마음을 가다듬고 평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 아란, 군단장 학과에 저런 여학생도 있었나요?"

 아란은 어딘가 익숙한 분홍색 머리칼을 보며, 그녀가 누군지에 대해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머리 길이는 다르지만 저 분위기는 아마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이 맞을 거 같은데….

"아마, 루시드라는 1학년생일 거야. 저런 연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사람이 더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그녀는 머리가 길었는데…"

"이미지 변신일지도 모르지. 그나저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맞아요. 그나저나, 루시드.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그 이야기는 지금 하는 이야기와는 논점에서 벗어났어요! 먼저 시비를 거신 건 그쪽의 힐라라는 분이고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사과를 받아야겠는데요?"

"유순해 보이더니 제법인데? 그런데 어쩌나, 우리는 우리보다 오합지졸인 이들에겐 고개를 숙이지 않거든. 약육강식. 그게 자연의 섭리 아니었나?"

"매그너스, 당신은 그렇게 힘만을 추구하다가 노바 학과에서 크게 분쟁 일으키고 군단장 학과로 전과한 거로 아는데, 그러다가 한 번 크게 다칠 거야."

 란이 지지 않고 그의 말에 반기를 들자, 매그너스는 험악한 표정으로 앞으로 걸어나왔다. 해볼 테면 해보라지. 나도 힘이라면 어지간한 남자에 지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려 할 때 아란이 카운터를 어디에 날려야 가장 효과적일지 견적을 내는 순간, 그의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맞아. 그러니까 지금 다치기 전에 그 내민 손을 냉큼 치워버리지 그래?"

  아란이 바라본 매그너스의 뒤쪽에는 정신을 차린 듯한 루미너스가 있었다. 평소의 루미너스와 비슷했지만 조금 달랐고, 그렇지만 아까의 술에 취했던 그도 아니었다. 뭐랄까, 다소 공격적인 표정이긴 하지만 분위기는 냉철한, 그 두 루미너스를 섞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한 발짝 뗄 때마다, 말을 해나갔다.

"과 수석을 하면 좋은 점이 많지."

"교수님 추천으로 학과 행정실에서 성적 처리하는 근로장학생 자리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런데 이거 내가 일부러 본 건 아니고 말이지, 우연히 너희들 성적을 확인했는데."

"우선 힐라. 너는 학교에 화장술 자랑하러 왔냐? 뭐, 성적은 인권을 생각해서 밝히진 않겠지만, 조만간 집에 성적표 도착하면 큰일날 거란 것만 알려주지."

"그리고 매그너스. 넌 힘쓰는 게 그렇게 좋으면 차라리 체대를 가지 그랬어? 학과 전공 수업들 성적이 말도 못하겠더라. 학과 교수님 눈밖에 나는 거 아닌가 모르겠군."

"마지막으로 루시드. 네가 은월더러 학교에 출석 운운할 처지는 아닌 거 같던데? 성적이 좋으면 뭐하나. 출석을 검마 교수가 하는 수업만 전부 출석하고 나머지는 전부 출석체크도 안하더니만. 은월은 병원 진단서라도 있었지. 내가 알기론 검마 교수가 내년에 연구년이거든. 그 때도 네가 은월을 비웃을 수 있을지 한 번 보자."

혼자서 3명을 휘어잡는 루미너스의 말발에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할 말을 모두 잃을 정도였다. 굳이 힘만 썼다면 피곤해질 뻔했을 거라 아란은 생각했다. 하긴 성인인데 치고 받고 했다면 틀림없이 경찰서에 갔겠지. 어쨌든 그런 루미너스의 신랄한 독설에, 이대로만 있으면 망신당하리라는 걸 안 아카이럼 교수는 그를 따라온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그 곳을 빠져나왔고, 호프에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루미너스, 너 대단하잖아? 평소에는 너무 신중하고 고지식해서 이런 말은 죽어도 안 하고 그냥 입만 다물고 있더니, 오늘 멋있었어!"

메르세데스가 감탄하자, 루미너스는 다소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그저 술기운이 좀 올라있었던 것도 있고, 뭐랄까 우리 학과를 대놓고 낮잡아보니까 화가 나더라고. 싸움이 더 번질까 걱정이 안 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운 좋게 이렇게 끝나서 다행인 거 같네."

"운이 아니에요. 실력이죠 이건! 전 루미너스 선배가 평소에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으음, 그치만 술 너무 드시게 한 건 죄송해요."

"맞아, 나도 미안해. 취하면 얘가 어떻게 될까 싶어서 궁금해서 팬텀 장난에 한 번 거들어준 건데 너만 힘들게 한 거 같네. 미안하고 정말 고마워."

 아란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루미너스를 향해 사과했지만, 눈치없게 그 순간 팬텀이 끼어들었다. 넌 이런 때는 장난 좀 자제해야 하지 않겠니?

"이게 내가 샌님에게 술을 먹였기에 역전승이 가능했던 거 아니겠어? 다들 나한테 고마운 줄 알…읍읍!"

 일이 또 터지기 전에 아란이 황급히 그의 입을 막았다. 생각해보니 루미너스 입을 막은 손이어서 루미너스가 손바닥을 자꾸 핥으려 하는 와중에 침이 조금 묻었을지도 몰랐겠지만, 굳이 그걸 팬텀에게 알릴 필요는 없어보였다. 뒤이어 그렇게 팬텀이 입막음 당한 사이 은월도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사과했다.

"그래그래. 루미너스, 나도 미안하다. 혼자 당하는 기분이 얼마나 나쁜지 알고 있었는데 다른 애들을 말리질 못했어. 내가 숫자 하나 덜 부르거나 더 불러도 뒤에서 자꾸 조작이 가능하니…."

"그건 조금 화나지만, 그래도 그 벌주 때문에 더 큰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니 봐주지. 다만 좀도둑, 너는 내게 요주의 인물로 이미 찍혔는데 이런 일을 또 벌이다니. 앞으로 또 걸리면 그 때는 정말 각오하고 있으라고."

 루미너스는 그냥 넘어가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의 시선은 팬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아란이 머리를 열심히 굴려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루미너스, 너 저 학과 검마 교수가 어떻게 내년에 연구년인 줄 알았어? 지어낸 건 아닌 거 같던데."

"휴, 결국 밝혀야 하는 건가… 좋아. 사실을 말하자면, 검마 교수는 내 아버지야."

"에, 에에, 에에에에~?!"

 그의 고백을 들은 아란은 적잖게 경악했다.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루미너스가 설명했다.

 

"실은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냐. 집에서 얼굴도 잘 안 마주치고 이야기도 잘 안 해.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핏줄이긴 하지만 거의 남남 취급이지."

"그래서 루미너스가 군단장 학과로 가지 않았구나."

"나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길이 있는데 자꾸 그는 자신의 길을 강요하니까. 조기졸업하려는 것도 가능한 빨리 대학원 가서 그 쪽에서 성과를 내면, 더 이상 거기에 대해 불편하게 얼굴 맞댈 필요도 없어서 그런 거야. 젊었을 때는 멀쩡했다던 거 같은데 왜 나이 먹고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니까."

 루미너스가 한숨을 쉬면서 지갑 안쪽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아란은 사진 속 인물을 보자, 뭔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진? 어라, 루미너스 너 아냐?"

"아니에요. 루미너스는 한 눈만 붉은데 이 사람은 두 눈이 모두 파란색이잖아요."

"아버지 젊었을 시절이야."

 

루미너스가 찬물을 마저 들이키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당연히 단체로 한 번 더 경악했다.

"맙소사! 내가 이전에 지나가면서 봤는데 그 검마 교수라는 사람은 이 사진 속 사람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구! 일단 이미지 칼라부터 다르잖아!"

"오늘 정말 거하게 놀라네… 종강하고 기분 좋았는데 지금은 기운이 다 빠진 느낌이야."

 

 메르세데스의 절규 어린 목소리에 공감하듯이 은월이 암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루미너스가 한숨을 폭 쉬면서 어쩔 줄 몰라 하자, 에반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뭐, 방해꾼도 지나갔긴 하지만 이대로 여기서 마무리하긴 아쉽고, 2차 가는 건 어때요?"

"그럼 포차에서 가볍게 한 잔 하다가 다들 들어가는 걸로 하자. 근처에 괜찮은 곳을 알거든."

 아란이 바통을 이어받아 제안하자, 다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사이 아란의 손을 자기 입에서 떼낸 팬텀은 숨을 고르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좋아. 그럼 다들 나가 있어. 나는 계산하고 올 테니까 밖에서 조금만 바람 쐬면서 기다려."

 그 이후, 그들은 포차에 둘러앉아 소주 몇 병을 더 깐 이후 해산했다. 아까의 해프닝으로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다들 분위기 탓인지 술에 그리 취하지 않았음에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시간이 어느새 많이 흘렀는지, 새까만 하늘에는 은빛 달과 많은 별이 총총하게 박혀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어. 그럼 방학 잘 보내고 개강하고 또 보자!"

 란은 모두에게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원한 바람 덕에 술이 어느 정도 깬 것일까, 아란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이 일들은 오늘 같이 있었던 녀석들과 있지 못했다면 절대 일어나지 못했겠지. 아직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들이 자신의 진정한 친구들임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과 앞으로도 이런 날들을 계속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그녀는 집에 도착해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문이 열리자 그녀와 닮은 외모의, 하지만 훨씬 키가 큰 남자와 황금빛 털의 꼬리가 탐스러운 고양이가 그녀를 반겨주었다.

"누나, 많이 늦었네. 술 너무 마신 건 아니지?"

"에구, 우리 아란이 집에서 잘 쉬고 있었나 보네. 늦게 들어와서 걱정시켜서 미안해."

 사실 두 남매의 이름은 한자만 다를 뿐 같은 아란이었다. 같은 이름 탓에 누나가 사소한 트러블에 휘말린 게 한두 번이 아니기에, 남동생 쪽 아란이 일부러 다른 대학에 진학한 계기이기도 했다. 그에게 이런 세심하고 다정한 면이 있음을 에반은 꿰뚫어보았기에 부러워했던 것인데, 물론 둔한 누나 쪽 아란은 그것을 몰랐고 그저 착한 남동생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어쨌든 남동생 아란은 안심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뭐, 누나 괴력이라면 딱히 걱정은 안 해. 다만 내일 피곤해질까 봐 걱정한 거지."

"야옹."

"그렇구나. 에구, 우리 마하. 잘 놀고 있었쪄요? 귀여운 녀석!"

"야오옹!"

"아, 술 냄새 나서 싫어한다. 얼른 가서 씻고 자."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너 내일 간식 안 준다?"

 

 마하가 뭐 어쩌라고 하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쌍둥이 남매는 웃음을 터트렸다.

"야, 이 녀석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이라거나 그런 거 아냐? 진짜 말 잘 알아들어!"

"그런 생각 나도 자주 하는데, 설마. 그리고 그렇게 되면 누나는 전혀 모르는 남자랑 얼굴을 부비부비한 게 되니까 생각해보면 기분 나쁘다고."

"아, 그렇네. 그럼 난 씻고 들어가 잘 테니까 너도 너무 늦지 않게 자라."

"엉. 깨끗이 씻고. 잘 자."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란은 침대에 누워 소중한 주변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 친구들이, 그리고 가족들이 날 생각해주는 만큼 나도 그들을 소중히 여겨야지. 앞으로도 이런 날이 이어질 수 있도록. 그녀는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녀 머리맡에 열린 창문으로, 북두칠성이 유난히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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