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이 - 에반 / 여름
"에반, 에반- 교수님과의 면담쪽은 잘 끝냈어?"
"몰라, 미르- 저 바뻐서 그런데 나중에 통화할게, 지금은 정신이 없어서..."
"앗! 잠깐만, 에반! 나 아직 대화 덜 끝났....!!"
대충 미르가 봉사 해야한다고 구구절절히 말하던, 그 뒷얘기가 무엇인지 잘 예상이되니까 이쯤에서 그만둬야지. 그 어느때보다도 에반은 단호하게 통화 중단을 선언하고, 아득해지던 전화 너머의 목소리를 단번에 끊어버렸다. 쾌청하고도 우렁찬 매미들의 합창이 귓가를 때려온다. 안그래도 지끈거리던 옅은 두통이 합창에 화답하듯,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이 거슬린다. 에반은 홀로 남은 강의실에서 나지막한 한숨 한 갈래를 내뱉었다.
때는 제가 입학한지 어느덧 반년이 지나버린 여름 계절 학기. 모처럼 의학과에 풋풋한 막내가 들어왔다면서 선배들에게 된통 맞지도 않은 술을 억지로 꾸역꾸역 마셔갔던, 흡사 햇병아리와 같았던 모습은 지금의 그에게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왔다. 할랄 없이 멍만 때리던 그는, 조심스레 자신의 스마트폰에게 전해져온 소식이 있나 확인했다. 하지만 그런 희망적이었던 기대를, 냉정한 현실이 단숨에 부숴버리는 것 마냥 화면의 소식알림은 텅 비워있었다. 젠장, 이래서 이놈의 조별과제는 하기 싫었다고-! 입학 초기부터 벌써부터 대학생이라고 우쭐되던 주위의 허심탄회했던 무수한 말들이 하나같이 가르쳐주는 건 단 하나였다. 조별과제란 암 프로젝트는 꼭 나중에 착해빠진 한명이 다 몰아서 하게 되있다고 말이다. 천진난만했고 반신반의했던 그 시절의 나로썬 그 말의 한 명이란 가엾기 그지없는 희생자가 바로 자신이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얼씨구~ 벌써부터 세상 다 산 모습은....에반, 살아있냐?"
왠지모를 약간의 짖궂음이 가득 담긴 미성이 책상위로 널부러져 있던 절 깨우는 촉매가 되었다. 고운 눈웃음을 치며, 특유의 장난기가 가득 서린 신비로운 자안과 보기드문 미남형에 가까운 앳된 얼굴. 그리고 그위로 박혀있는 보기좋게 자유로운 성향이 베어나오는 미소. 그리고 해부학 실습을 끝내고 왔는 참인지, 검붉은 핏방울의 무늬가 약간 섞여들어간 실습복 가운이 눈에 띄였다. 3살 선배인, 3학년의 팬텀이었다.
".....몰라요...저 죽었어요, 찾지마요."
"여름에 갑자기 잡힌 해부학 실습에 치인 내 인생보단 그래도 괜찮을 거다- 그러니 너 좀 힘내라고 카폐라떼 하나 사왔다. 마셔."
"피....커피 때문에 봐주는 줄 알아요."
빼앗아버리듯 팬텀의 손에서 카폐라떼 잔을 낚아챈 에반은, 제 옆에 불쑥 다가와 앉는 그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점점 성장하고 있던 항공사를 주 무대를 바탕으로 얻은 어마어마한 재력, 가히 강동원이라 불릴만한 미친 외모, 거기에 느긋느긋하면서도 눈치가 빨라 사람의 마음을 손끝으로 움직일 수 있을 기막힌 성격, 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그의 방문이 오늘따라 이토록 반가울 줄은 몰랐다. 부드러운 커피 맛을 입안으로 홀짝이던 에반은, 자신의 과제들을 가벼운 눈 훑음으로 넘겨보는 팬텀의 옆모습을 슬쩍 제 청안으로 훔쳤다. 부럽다, 젠장- 저보다 잘난 사람들은 넘쳐나도록 많다는 사실이, 이토록 암담하게 제 마음께로 닿아올 줄은 몰랐다.
"에어컨 빵빵한 여름날의 강의실이라.....생명 윤리 쪽은 꽤 복잡한 모양이지?"
"어휴...나인하트 교수님께서 이렇게 까다로운 문제를 내주실 줄은 몰랐어요...망할 교수님이라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진짜...."
"킥킥...하기사 나인하트 고 녀석은 깐깐하긴 드럽게 깐깐해가지고, 내 무슨 샌님이 이 세상에 두 명쯤은 있는 줄 알았다고~"
"그 말 취소하시지, 망할 녀석?"
팬텀이 심중의 농담 삼아 늘어놓은 말들을 주워들었는지, 루미너스의 나지막한 중저음이 울려퍼진다. 고개를 들어 문 쪽으로 시선을 돌아보니, 팬텀처럼 실습복을 입은 채로 돌아온 두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책속으로만 접했던, 유전학적으로 매우 드문 사례인, 오드아이의 묵묵한 3학년 선배 루미너스. 그리고 대학 내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매력적인 여대생 1위로 선발된 경력이 있는, 3학년의 메르세데스 선배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어이구, 너 일부러 들으라는 소리인데, 샌님?"
"괜히 애꿎은 얘한테 시비 걸지 말고 좀 물러서, 팬텀. 루미너스, 너도 그만하고- 아리아가 안 그래도 너 찾고 있더라? 나이팅게일 선서식 연습이 벌써 끝났는지, 시그너스랑 같이 기숙사 앞 카폐로 가더라."
"어이쿠, 우리의 아름다우신 여왕님께 감사감사~ 나중에 스X벅X 기프X콘 하나 쏠게~"
"와, 더럽게 째째하네. 나중에 밥 한턱 안사면 아리아한테 너 저번에 레지스탕스 동아리 여자들과 소개팅 간 거 다 이른다?"
아 그건 절대 사절이야~ 그 말을 여운처럼 남기고선, 팬텀은 일찌감치 무슨 소설 속에 나오는 괴도처럼 사라지기 이르렀다. 그 모습을 보던 루미너스와 메르세데스는 연달아 의미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고선, 그제야 에반에게 말을 트기 시작했다.
"안녕, 에반. 오랜만이야. 1학년 생활은 잘 되가니?"
"....묻지 마세요. 이러다가 해X포X처럼 마법지팡이로 교수님을 찌를 판국이예요...."
"...정신이 아주 맛 갔군. hallucination(주*의학용어 : 환각) 증세를 보이고 있어."
"안 그래도 지금 에반의 상태 뻔히 알면서, 얘한테 의학용어 남발하는 너가 가장 나쁜 놈이야, 루미너스."
미안하다. 루미너스의 짧은 사과가 옅어져만 가던 에반의 머릿속에서 메아리마냥 울려퍼진다. 그래서 이놈의 조별과제는 언제 끝날까요? 악보위로 춤추던 도돌이표마냥 되풀이되던 에반의 한탄에, 두 사람은 그저 안쓰러운 미소로 화답하기만 했다. 길기만 하다고 느껴지던, 무더운 어느 7월의 여름날의 오후가 나른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