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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 - 은월 / 교우를 사귐

 

 

는 터덜터덜 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역시 조별과제가 생겼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조별과제는 말 그대로 버스였다. 버스를 운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걸 타는 사람이 있다. 하다못해 돈이라도 내고 타면 모를까 이 승객들은 뻔뻔하게도 무임승차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버스 운전사는 나였다. 나는 그들이 무임승차를 하더라도 뭐라 할 수가 없었다. 천애고아. 중학교까지는 고아원에서 보내줬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고등학교까지 보내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해마다 새로운 아이들이 계속 들어왔기에 나는 결국 고아원의 보살핌을 받는 대신에, 기숙사가 딸려있는 고등학교를 들어가 장학금과 알바비로 버티기로 결심했다.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상위권을 유지해 이름 있는 대학에 들어왔지만 그만큼 학비가 비쌌다. 게다가 기숙사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알바만으로는 학교에 쓰이는 돈을 충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꼭 높은 학점을 유지해서 장학금을 타야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내 사정을 알고 무임승차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조별과제를 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버스기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가 말수는 적고,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그들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이제는 그저 편한 도구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꼴이 보기가 싫었지만 아쉬운 건 나기에 나는 그저 참고, 또 참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번에 만나는 애들도 그렇겠지.’

름은 출석을 부를 때마다 들었기에 나름 익숙했지만 얼굴을 보거나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개중 일부는 출석할 때마다 대답이 들리는 거 보면 열심히 하는 애들인 거 같지만 수업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과 조별과제를 함께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마 이번에도 똑같이 나 혼자서만 준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나는 어느 샌가 도서관에 도착했다. 이번 조별과제에 주제와 관련이 있는 책들이 있는 곳에서 책들을 하나하나 읽고 있는데 갑자기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냥 책을 보러 온 사람이겠거니 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그 인기척은 내 옆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심지어는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금빛이 녹아있는 밝은 갈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하늘처럼 맑은 푸른색 눈을 가진 청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청색이 녹아있는 백발에 바다처럼 진한 푸른색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앞선 청년이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뒤에 청년은 날카로운 인상을 가지고 있어 둘의 분위기는 정말 양극단을 달리고 있었다. 갈색 머리의 청년이 싱긋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은월이지?”

나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상대는 내게 용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알고 있기에 놀란 것이다. 게다가 또 나를 대하는 것에 있어서 너무도 따뜻한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그는 자신과 뒤에 청년을 차례차례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프리드고, 이 친구는 루미너스야.”

루미너스라고 불린 청년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내게 인사했다. 나는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이번 조별과제를 함께하는 동료들 중 두 명이었다.

“네가 조별과제 때마다 도서관에 온다고 들어서 찾아왔는데 마침 잘 만났네.”

“나, 나를?”

내가 당황해서 되묻자 프리드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별과제잖아. 같이 해야지.”

실 조별과제를 하면서 자료를 조사해오고 과제에 참여했던 이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개인별로 조사하고, 따로 과제를 완성시켜서 마지막에서야 정리하는 식으로 과제를 끝마쳤다. 그래서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함께 조별과제를 하자고 하는 이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계속 여기서 떠들기도 뭐하니까 일단 나가자.”

그는 내 의사는 묻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내 팔을 잡고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당황하여 저항할 생각도 못하고 그를 따라갔고, 도서관을 나와 도착한 곳은 대학 내에 있는 카페였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발에 힘을 주었다.

“자, 잠깐만…!”

내가 자리에서 멈춰서며 소리치자 그들은 걷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들의 얼굴과 카페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저…, 그 미안한 말인데…, 난 카페는 못 가.”

“응? 왜?”

 

프리드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고, 뒤에서 루미너스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어.”

프리드가 내게로 얼굴을 가까이 대며 되물었다.

“뭐라고?”

“…커피를 사 먹을 돈이 없어.”

비록 얼굴을 쳐다보진 않았지만 나는 둘이 살짝 당황해한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손목을 잡고 있는 프리드의 손아귀에 더 힘이 들어가면서 말없이 나를 끌어당겼다. 내가 그것에 당황하여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앞으로 웃고 있는 프리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럼 뭐 어때? 우리가 사주면 되지.”

“아, 아니….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내가 얼른 변명을 늘어놓으려는데 그 때까지 말 한 번 안하던 루미너스가 대답했다.

“부담스러워할 거 없다. 있는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놈이 있으니까. 우리 것도 다 그녀석이 사니 걱정 마라.”

나는 대꾸도 못한 채로 결국 그들을 따라 카페로 들어갔고, 문에 달려있는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구석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프리드, 루미너스!”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조금만 더 늦었으면 갈 뻔 했다고.”

“여어, 네가 은월이구나?”

가장 처음의 말은 반짝거리는 금발을 길게 기르고 맑은 청안을 가진 여성이었고, 두 번째 말은 마찬가지로 빛나는 금발의 자주색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세 번째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하나로 묶은 백발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들에게 다가가면서 프리드가 그들을 소개시켜주었다.

“인사해, 은월. 여긴 메르세데스, 팬텀, 아란이야. 그리고 이쪽은 방금 말했듯이 은월이고.”

나는 내게로 시선이 단번에 쏠리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소심하게 나를 소개했다.

“으, 은월이야….”

“이거 뭐야. 완전 소심한 녀석이잖아.”

“시끄럽다, 좀도둑.”

난스레 투덜거리는 팬텀에게, 루미너스가 빈자리에 앉으면서 나무랐다. 프리드 역시도 빈자리에 앉았고, 나를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혔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들을 둘러보았다. 6명. 조별과제 인원과 딱 맞아떨어졌다. 결국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모였다는 뜻이다. 나는 내심 이들의 단합력에 놀라면서도 과연 이곳에 껴도 될까 고민했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메르세데스가 먼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은월. 반가워. 프리드가 소개했지만 난 메르세데스야.”

뒤이어 팬텀과 아란도 자신을 직접 소개했다. 나는 소심하게 어, 응. 이라는 바보 같은 대답만 내놓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으음, 일단은 주문 먼저 하는 게 어때?”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리자 프리드가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제안했다.

“난 아메리카노로.”

“나도 그럼 간만에 평범한 커피나 먹어볼까.”

“나는 홍차로 하겠다.”

“나도 루미너스랑 똑같이.”

“흐음, 그러면 나도 홍차로 할까.”

 

프리드의 도움이 무색하게 다른 이들은 다 메뉴를 고르는데, 나 혼자만 고르지 않게 되면서 모두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쏠렸다. 나는 고개를 들지는 못한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 난 괜찮아.”

“응? 은월은 왜 안 시켜?”

메르세데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오자 루미너스가 쯧하고 혀를 차며 대답했다.

“커피 사먹을 돈이 없다고 하더군.”

나는 귓불까지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다.

“그건 샌님,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래서 좀도둑 네 놈보고 사라는 거 아니냐.”

“와, 진짜 뻔뻔하네, 샌님.”

“네놈은 물주 아니면 할 일도 없지 않나?”

“얘들아, 진정 좀 하고….”

 

나는 분위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가는 것에 창피해하던 것도 까먹고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당황한 나하고는 다르게 다른 이들은 익숙한 표정으로 그들의 싸움을 흥미진진하게 보았다. 유일하게 싸움을 말리던 프리드는 둘이 좀 진정되는 것처럼 보이자 내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하, 미안. 이런 모습 보여서….”

“아, 아니야. 괜찮아.”

“보다시피 우리도 팬텀이 전부 사주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그래, 맞아. 여기 있는 녀석들의 물주 역할은 다 내가 맡고 있으니까 마음껏 물주 취급하라고.”

왠지 모르게 재밌어하는 듯한 말투였다. 게다가 그 장난기 안에는 다정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나는 재차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어째선지 눈물이 차오르는 것만 같았다.

“…은월, 혹시 울어?”

“아, 아니야.”

나는 얼른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지만 눈물은 쉴 새 없이 차올랐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져서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 때 누군가의 팔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것이 곧 프리드인 것을 깨달았는데 그는 내 등을 토닥이며 나를 위로했다.

“그래. 울고 싶으면 울어. 울어도 괜찮아.”

나는 그 말과 함께 말없이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렇게 몇 분가량 눈물을 떨어트리고 좀 진정이 되고나서야 프리드는 나를 놓아주었다. 그는 나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이제 좀 진정이 돼?”

“…응.”

나는 뒤늦게 몰려오는 창피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얼굴을 아래로 숙였다. 첫 만남부터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 것에 계속해서 후회가 몰려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얼마 안 가 사라졌다. 애들의 반응이 대수로운 것도 있었지만 또 다시 루미너스와 팬텀이 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하, 사람이 살다가 웃을 수도 있는 거지 뭘 창피해하고 그래.”

“맞아, 맞아. 물론 남자가 우는 모습이 별로 달갑지는 않지만 말이야.”

“넌 그 입 좀 다물어라, 좀도둑.”

“왜 또 시비야, 샌님?”

“하아, 진짜 너희들은 그새 또 싸우니?”

“얘들아, 진정 좀 하고…!”

 

또 다시 서로 으르렁거리는 루미너스와 팬텀 때문에 분위기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걸 프리드가 다시 말렸고, 한숨을 쉬던 메르세데스나 나를 위로하던 아란도 그들을 보면서 웃었다. 결국 나 역시도 그것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고, 모두들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뭐야, 은월. 웃을 줄도 아네?”

“하아, 좀도둑 너는 진짜….”

“은월, 웃으니까 보기 좋다! 좀 웃고 다녀봐!”

“확실히 우울한 것보단 웃는 모습이 훨씬 낫네.”

“웃으니까 덩달아 나도 기분 좋아지는 걸?”

 

마다 웃으며 한마디씩 던지는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져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미소를 지었고, 우리들 사이에는 수많은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조별 과제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결국 그 날은 조별과제에 대한 얘기는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날, 나는 일생을 통틀어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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